근데 이제 문제는 그 '착함' 이 유지가 되냐 안되냐의 문제고
더 나아가 유지가 안될 거 같이 보인다는 게 더 심각한 문제인거지
이게 '착하다' 라는 게 정확히 어떤건지 생각부터 하고 넘어가야 하는데
나는 착하다는게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한 책임을 지려고 한다' 에 가깝다 보거든
그러니까 이게 유지되려면, 즉 '책임을 지려는 경향성' 을 유지되려면, 그 사람을 둘러싼 사회 구조는
'책임을 지려는 경향성' 을 유지되는 구조여야 됨
책임을 지려고 하는 상태에서의 부담감이 작아지거나
책임을 지려고 하는 것을 '어리석다' 라고 폄훼하지 않거나
근데 이슈화되는 것도 그렇고, 인터넷 상에서의 환경도 그것을 뒷받침하지만
점점 사람들이 '내가 말하는 것, 내가 하는 것에 대한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 방향으로 기울고 있음
이는 '무언가를 즐기는 문화' 자체의 경향성이 책임을 지지 않는 것으로 기우는 것도 한 몪 하지만 (즐기기만 하면 된다는 인식)
그것만큼, 혹은 그것보다 더욱 큰 영향으로써
'책임을 지는 상태에서의 부담감' 이 커지고 있는 경향이 있다는 게 문제인 거 같음
예를 들어서, 많은 청년들은 부모님의 자식으로써 부모님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 함
그러나 그런 청년들은 동시에 사회의 어른들에게 '사회의 일꾼이 되어라' 라는 형태의 책임을 부여받고 있음. 스스로 지지 않으려 해도
혹은 사회에서 법을 지켜라라고 하는 책임성도 있고, 돈을 내고 물건을 사야 한다는 책임성 등등, 모든 종류의 규범과, 사랑과, 기대는 개인에게 있어 '책임을 져라' 는 것을 자연스럽게 요구하게 됨
그리고 이 모든 책임성들은 당연히 많은 영역에서 충돌함. 부모님의 자식으로써 성공하려면, 어느 한 순간은 이기적이어야 하는 순간이 옴. 그러나 그렇게 되면 사회의 일원으로써의 책임을 저버리게 되는 그런 상황이 옴. 내가 돈이 없으면 내 건강을 지키려는 책임성을 지키지 못하고, 내가 돈이 없어도 살아가려고 하면 법을 지키려는 책임성을 저버리게 되고....
단순화해서 이 정도고, 실제로는 이것보다 훨씬 더 많은 부분에서 '책임성' 을 져야 함. 따라서, 책임성의 방향이 모순되는 경우도 너무 많기 때문에 점점 더 자기 자신을 소모하고, '책임을 져낼 수 있었다!' '해냈다!' 라는 형태의 탈출구는 점점 더 멀어지게 됨.
이 탈출구를 개인이 '내 건강을 깎아서 버틴다' 라는 개념으로 얻으려 하면 이제 무리하기 시작하는거고, 그래서 탈출구가 죽음 너머에 있으면 그대로 고독사로 가게 됨. 이게 청년고독사의 원인임
내 능력을 상회하는, 책임감의 충돌들 사이에서 눌려죽는 것
그리고 이건 당연히 개인에게 소모됨을 요구하기 때문에
대부분은 이것을 버티지 못하고 중도에 어떤 책임성을 포기하게 됨. 자기가 질 수 있는 책임성만 지려고 하던가....
아니면 책임을 안 지려고 하는 경향을 점점 더 키우거나...
이게 개인에게 책임성의 부담감이 커지면 커질수록, 점점 개인은 자신이 생각하는 특정 분야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건 어리석은 것' 이라고 여기게 되고
그 견해의 설득력은 사회에서 개인이 겪는 책임의 부담감 그 자체에서 오므로, 사회가 개인에게 주는 부담감이 상승하면 상승할수록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 절대적이면 절대적일수록
고독사가 발생할수록
다른 개인은 그 책임을 버릴 명분을 얻게 됨
그것이 무책임, 즉 악함으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함. 이런 경향은 즐김에 있어서 책임성을 약화시키거나, 혹은 책임성이 약화된 '즐김 문화' 에 의해서 더더욱 강화될 수 있음. 어느쪽이 먼저랄 건 없을 것이라 생각하긴 하지만, 둘이 상호작용을 통해서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기재로 작동할 수 있다고는 생각이 들고.
종합적으로, 한국 청년은 내가 생각했을 때는 착한 게 맞음
단순히 착하다고 느낀다기 보다는, 내가 느끼는 부담감의 영역을 다른 한국 청년들도 느낀다고 가정했을 때
이 정도로 버틴다는 게 (뭐 베글 나온 것처럼 갱단 없고 그런것도 있긴 하지만) 착하다고 볼 만한 증거가 아닐까, 하고 생각함
근데 이제 문제는 이 부담감을 덜어줄, 즉 '책임을 져야 한다' 라는 상황에 대한 부담을 경감시킬 장치가 너무 없어보여서
책임을 지려 하다가 죽던가
책임을 버리고 생존하는 대신 악해지던가
둘 중 하나의 영역으로 기우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어 보인다는거고
책임을 지려고 해도 안 죽을 정도로 부담감을 경감시켜줘야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내가 겪고 있는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부담감 경감 장치로써 작동하는 문화는
병자한테는, 혹은 사고 당한 부상자한테는, 장애인한테는 무리한 일을 시키지 않으려고 배려해주기
이 정도가 끝임
내가 작년 이맘때쯤 실험하다 사고나서 병원 입원을 한 2달정도 했을 때가 내 인생에서 제일 편하게 쉬었다고 생각했었는데
반대로 말하면 그 정도가 아니면 내가 겪고 있는 상황에서 오는 책임감의 무게를 회피할 방법이 없단거임
다른 사람들은 다를까? 아니라고 봄
다만 각자의 능력, 각자의 상황이 다르니까 혼자 져야 하는, 그리고 질 수 있는 책임의 무게가 다를 뿐이지
그럼 이 상황에서 한국 청년들이 진짜로,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착한 게 맞다고 해도
문제는 거기에 있는 게 아님. 이런 상황이 유지되면 그 착한 게 유지가 안될거임
그래서 여기에 대고 '혁명해라' 라고 하는 것도 무리수인거임
혁명하자는 말은 '혁명' 에 해당하는 책임을 새로 부여해버리는거라
실제로 혁명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책임에 참여하는 이들은
사회에서 자신이 지고 있던 책임의 어떤 영역을 포기해서 책임을 질 여력을 가진 이들일 수 밖에 없고
다르게 말하면 특정 영역에서 '악해진' 이들일 수 밖에 없음
악해진 이들이 진행하는 혁명이라는 책임은 악한 방향성에서 나타난 가치관을 요구하려 할 거고 자연스럽게 극단화됨
그래서 결국 우리가 해야 하는건 나는 관용이라고 생각을 함
우리가 책임에서 부담을 얻는 것은, 그 책임이 실패해서는 안된다는 무관용의 분위기 안에 갇혀 있기 때문임
그러니까 여기에 관용을 더해서 책임에 실패해도 괜찮다는 그런 인식이 있어줘야 함
이건 단순히 '사랑해라' 라는 게 아님. 오히려 사랑은 경우에 따라 사랑에 보답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새로 전개함
그리고 이 관용은 제도화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제도란, 규범이란 관용적일 수 없는 절대적인 형태로 나타나므로
관용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건 철저히 개인임
'나 자신부터' 관용적이어야 한다는거임. 착한 것 이상으로
물론 관용할 수 없는 현실적인 한계는 분명 있음. 그런 영역에까지 관용을 베풀 수는 없음
그러나 반대로 말하면, 현실적인 한계로 인한 것 이상으로 그 책임성을 타인에게 부여하지는 말자는 이야기임
나 자신에게 책임성을 부여하는 건 오롯히 나 자신이어야 하고
내가 타인에게 책임성을 부여하는 것은 현실적 한계 이상이어선 안되는 거라고 생각함
만일 그렇지 않다면, 모든 개인이 모든 타인에게 책임성을 부여하고, 그 책임성의 무게에 짓눌리는 사회에서라면
사람들은 결국, 운이 좋아서 그런 상황이 아닐 수는 있어도
결국에는 죽거나, 악해지거나 둘 중 하나의 선택지만을 강요받게 되니까
(IP보기클릭)113.160.***.***
(IP보기클릭)168.131.***.***
2030을 탓하는 게 아니라 2030이라고 불리는 사람들, 흔히 타겟팅되는 그 집단층이 생각보다 훨씬 착하다는거임 늙은층이 젊은층을 따라온다 이전에, 젊은층은 이미 늙은층에 대해서를 포함해서 '착한' 상태라는거임 문제는 이제 그 늙은 층이 만들어온, 그리고 앞으로의 젊은 층이 만들어갈 사회가 개인에게 가하는 부담감, 책임의 부담감이 너무 커서 이제 그 착함이 유지가 안 될거라는 게 문제고 | 25.07.01 11:30 | | |